영화 시작과 함께 등장하는 자막은 그래서 더 의미심장하고, 씁쓸한 아이러니를 느끼게 합니다. "이 영화는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하였으나 허구임을 밝힙니다"라는 문구인데요. 이건 마치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다"라고 강변하는 듯한 느낌이랄까요? 누가 봐도 특정 코인 사태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노골적인 설정과 전개인데, 굳이 '허구'라는 방어막을 치는 모습이 썩 유쾌하게 다가오지만은 않습니다. 아마도 법적 문제나 여러 논란을 피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였겠지만, 관객 입장에서는 다소 김빠지는 시작일 수 있겠습니다.
어떤 인물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의 과거를 들여다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사람은 결코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니까요. 영화 <폭락> 역시 주인공 양도현(송재림 분)의 과거, 특히 학창 시절부터 조명하며 그가 왜 그런 위험한 선택을 향해 질주하게 되었는지 그 배경을 보여주려 애씁니다. 도현의 어머니는 아들의 교육을 위해 불법적인 방법, 즉 위장전입까지 감행하며 그를 강남 대치동 학군으로 밀어 넣습니다. 실제 거주하지도 않으면서 해당 주소지의 집주인에게 매달 월세와 같은 돈을 건네면서까지 말이죠.
하지만 정작 양도현은 이런 어머니의 헌신적인 노력을 고마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가난한 환경과 어머니의 존재 자체를 부끄러워하고 필사적으로 지우고 싶어 하는 듯한 태도를 보입니다. 그의 뒤틀린 욕망과 인정투쟁의 시작점이 바로 여기에서 엿보이는 듯합니다. 공부 실력은 뛰어났지만, 학창 시절 결정적인 기회를 장애를 가진 친구에게 빼앗기는 경험을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 친구가 실제로는 장애가 없었으며, 제도를 악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큰 충격과 함께 '세상은 이런 식으로 이용해야 하는구나' 하는 냉소적이고 비뚤어진 인식을 갖게 된 것 같습니다.
이러한 과거의 경험은 훗날 대학생이 된 양도현에게 일종의 '학습 효과'를 제공합니다. 그는 정부 지원금이 감시가 소홀한 '눈먼 돈'이라는 점을 간파하고, 서류를 조작하거나 다양한 가산점 제도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정부 지원금을 타내는 방식으로 손쉽게 돈을 벌기 시작합니다. 이는 비단 영화 속 허구의 이야기만은 아닐 겁니다. 현실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법한,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벌어지고 있을지 모르는 우리 사회의 씁쓸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겠죠.
그러던 중, 양도현은 암호화폐 업계의 큰손으로 보이는 투자자 케빈(민성욱 분)을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코인 개발이라는 위험천만한 길로 들어섭니다. 케빈은 아마도 양도현의 젊음과 명문대 간판을 이용해 얼굴마담, 즉 '바지사장'으로 내세우려 했던 것 같습니다. 양도현은 케빈 앞에서 다소 무례하고 건방진 태도를 보이지만, 케빈은 오히려 이를 젊은 패기나 당돌한 자신감으로 해석하고 흥미를 느끼는 듯한 모습을 보이죠. 결국 양도현은 'MOMMY 코인'이라는, 자신의 결핍과 욕망이 투영된 듯한 이름의 암호화폐를 직접 개발하고, 현란한 언변으로 사람들 앞에 나서서 열정적으로 홍보하며 투자자들을 끌어모으기 시작합니다.
아직 젊고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양도현은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는 듯 거칠 것이 없다는 듯이 행동합니다. 반면,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케빈은 이미 다가올 위험을 감지하고 법적인 책임 회피 등 자신을 보호할 방어 장치까지 치밀하게 마련해 둔 상태였죠. 이 둘의 상반된 태도는 훗날 각자의 운명을 가르는 중요한 분기점이 됩니다. 영화는 앞서 언급했듯, 한국 사회에 엄청난 충격과 피해를 안긴 루나 코인 폭락 사태와 여러 스캠 코인 논란들을 주요 모티브로 삼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지점은, 영화를 연출한 감독 본인이 실제로 루나 코인 투자로 상당한 금전적 피해를 입었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자 했던 개인적인 동기가 더 강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하지만 솔직히 말해, 영화 자체는 여러 면에서 아쉬움과 부실하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특히 사건의 전개 과정이 매끄럽지 못하고 설득력이 현저히 부족하게 느껴집니다. 도대체 왜 'MOMMY 코인'이 그토록 짧은 시간에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는지, 그리고 어떠한 구체적인 메커니즘과 과정을 거쳐 그야말로 '폭락'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상당히 빈약하고 피상적입니다. 마치 감독이 "루나 사태가 뭔지 다들 잘 아시죠? 그러니 자세한 설명은 생략합니다"라고 말하는 듯한 인상마저 줍니다. 이미 관련 배경지식이 있는 관객을 전제로 이야기를 너무 쉽게 풀어가려는 방식은 다소 불친절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주인공 양도현이라는 인물의 내면 심리를 깊이 있게 파고들지 못한다는 점도 큰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그가 왜 그토록 위험한 도박에 모든 것을 걸었는지, 그의 행동 이면에 숨겨진 복잡한 동기나 성공에 대한 강박, 혹은 폭락 이후 그가 느꼈을 법한 절망감이나 죄책감 등이 효과적으로 그려지지 않아 캐릭터에 온전히 몰입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알고 보니 제작비가 5억 원 내외에 불과한 저예산 독립영화라고 하더군요. 원래는 6부작 드라마로 기획되었다가 여러 사정으로 인해 영화로 변경되었다고 하는데, 차라리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인물들의 서사와 사건의 디테일을 촘촘하게 풀어낼 수 있는 드라마 형식이 이 이야기에는 더 적합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영화라는 제한된 러닝타임 안에 담기에는 너무 방대하고 복잡한 소재였던 것 같습니다. 결과적으로 영화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는지, 그 핵심 메시지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와닿지 않는다는 안타까움이 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서 단연 빛나는 것은 배우들의 연기입니다. 특히 이제는 볼 수 없게 된 고(故) 송재림 배우와 베테랑 민성욱 배우의 안정적인 호연은 퍽 인상적입니다. 두 배우는 다소 헐겁고 부족한 서사 속에서도 각자 맡은 캐릭터를 입체적이고 설득력 있게 그려내며 극의 몰입도를 그나마 끝까지 유지시켜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결국 영화 <폭락>은 시의성 높은 중요한 소재를 의욕적으로 다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구조적인 한계와 아쉬움을 남긴 채, 송재림이라는 좋은 배우의 너무나 안타까운 마지막 필모그래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그의 마지막 연기를 스크린으로나마 볼 수 있다는 점에 의미를 두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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