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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아 페레즈 오스카

해마다 연말이면 '올해의 영화'니, '올해의 배우'니 하는 수식어가 쏟아져 나오곤 합니다. 그만큼 대단한 작품이나 인물에게 찬사를 보내는 미사여구로 쓰이는 경우가 많죠. 영화 '에밀리아 페레즈'는 적어도 올해, 제가 본 영화 중 단연 으뜸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에밀리아 페레즈'가 어떤 영화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관람했습니다. 심지어 뮤지컬 영화라는 사실조차 몰랐죠. 그래서 영화 시작과 동시에 쏟아지는 뮤지컬 넘버에 깜짝 놀랐습니다. 정극인 줄 알았던 영화에서 조 샐다나가 노래를 부르다니! 그것도 수준급의 노래 실력과 춤 실력을 보여주며 말이죠. 예상치 못한 그녀의 모습은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습니다.
영화는 크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반부는 숨 쉴 틈 없이 휘몰아치는 전개로 관객을 압도합니다. 다른 생각은 할 겨를도 없이 영화에 완전히 몰입하게 되죠. 후반부 초반은 다소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았지만, 이내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다시 펼쳐집니다. 물론 전반부에 비하면 다소 힘이 빠지는 건 사실이지만요.
영화는 '다른 인생을 살아가는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아주 고전적이면서도 다양한 작품에서 다뤄진 소재죠. 최근 소설 중에서는 더글라스 케네디의 '빅 픽처'가 떠오르네요. 누구나 한 번쯤은 다른 인생을 꿈꿔보지만, 실제로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화나 소설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이겠죠.
하지만 기술의 발달은 이제 성별까지 바꿀 수 있게 했습니다.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이죠. 남자가 여자가 되고, 여자가 남자가 되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지만, 엄청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영화의 주인공, 에밀리아 페레즈처럼 말이죠.

멕시코의 악명 높은 갱단 두목인 에밀리아 페레즈는 권력과 돈을 가졌지만,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안감에 시달립니다. 오랜 시간 치밀하게 계획한 인생의 전환을 실행하기 위해 변호사 리타(조 샐다나)에게 접근합니다. 자신의 성전환 수술을 믿고 맡길 의사를 찾아달라는 제안을 하죠.


여기서 핵심적인 질문이 던져집니다. '삶을 원하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성을 원하는 것인가?' 에밀리아 페레즈는 그 차이가 무엇인지 묻지만,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자신의 성 정체성에 따라 여자가 되려는 것과 단순히 여성이라는 성을 원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죠.

에밀리아 페레즈는 완벽하게 다른 삶을 살기 위해 여성이 되려고 합니다. 겉모습만 여성일 뿐, 속은 여전히 남성일 수 있는 것이죠. 이 부분은 저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겉모습이 여성으로 바뀌었을 때 사고방식까지 여성으로 변하는지는 경험해보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에밀리아 페레즈는 달랐습니다. 중대한 결심이었지만, 그녀에게는 확고한 철학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녀의 선택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한 판단이었고, 가족을 지키기 위한 절박한 선택이었습니다. 영화의 배경인 멕시코는 살벌한 현실을 보여줍니다. 수만 명이 실종되고, 유괴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곳이죠. 부유층 자녀들은 경호원의 경호를 받으며 등하교를 할 정도입니다.
완벽하게 자신을 숨기기 위해 여성이 된 에밀리아 페레즈. 하지만 겉모습만 변했을 뿐, 그녀의 내면은 여전히 그대로였습니다. 4년 후, 그녀는 여전히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이것이 비극의 시작이 됩니다. 철저하게 과거를 단절하고 새로운 삶을 살았어야 했지만, 그녀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지려는 욕심이 결국 파멸을 불러온 것이죠.
한편, 그녀는 여성이 되기 전 다른 인생을 살아보고 싶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에밀리아 페레즈 역을 맡은 카를라 소피아 가스콘은 실제 트랜스젠더 배우입니다. 과거 SNS 논란으로 오스카 이벤트에서 제외되기도 했지만, 그녀의 연기는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셀레나 고메즈 역시 자연스러운 연기를 보여주었죠. 뮤지컬 영화이지만, 노래는 단순히 대사를 대신하는 느낌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감정선에 맞는 넘버들이 돋보였죠.
영화는 멕시코의 어두운 현실을 너무 부정적으로 묘사했다는 이유로 멕시코에서 평이 좋지 않다고 합니다. 감독 역시 비난을 받고 있죠. 프랑스 감독이 만든 영화인데, 제작사가 이렇게 많이 등장하는 외화는 처음 봅니다. 저는 매우 재미있게 봤지만, 한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에서는 흥행이 저조한 편입니다. 하지만 작품성이 뛰어난 영화는 보통 그렇듯, '에밀리아 페레즈'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재평가받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회가 된다면 OTT 등을 통해 다시 한번 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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