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바둑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은 단연 조훈현과 이창호입니다. 두 사람은 사제지간으로, 이창호는 어린 시절 조훈현의 집에서 함께 숙식을 하며 바둑을 배웠습니다. 일반적으로 사제지간이라면 기풍이 닮기 마련인데, 이 둘은 전혀 다른 스타일을 보여주었습니다.
조훈현은 승부사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전투적인 기풍을 가진 반면, 이창호는 돌부처라는 별명처럼 차분하고 냉정한 스타일로 유명했습니다. 두 사람의 성향이 완전히 반대였던 만큼, 그들의 관계는 많은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주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바톤터치를 한 것처럼 보였지만, 이후에도 두 사람은 라이벌로서 치열한 승부를 이어갔습니다. 특히 이창호가 정점에 오른 이후에는 거의 그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예전에는 지금과 달리 바둑의 인기가 매우 높았습니다. 바둑 대국이 열리면 TV에서 생방송으로 중계될 정도였으며, 밤마다 다양한 대국이 펼쳐졌습니다.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는 알까기가 유행하기도 했죠. 하지만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결 이후로 바둑은 예전만큼의 인기를 끌지 못하고 있습니다.
체스와는 달리 바둑은 무궁무진한 수가 있어 컴퓨터가 인간을 이길 수 없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사람이 컴퓨터를 이길 수 없는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과거 바둑의 인기가 워낙 높았던 만큼 영화나 광고에서도 자주 등장했는데, 영화 <승부>는 바둑이 가장 인기 있던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영화 <승부>는 2021년에 촬영이 끝났지만, 배우 유아인의 논란으로 인해 개봉이 무기한 연기되었습니다. 유아인이 연기한 인물이 바로 이창호였기 때문에 영화 제작진 입장에서는 큰 타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영화는 두 라이벌에 대한 이야기지만 스승인 조훈현의 시각에 더 가까운 서사를 담고 있습니다. 이는 조훈현의 이야기부터 시작되며, 스승으로서의 역할이 강조되기 때문입니다.
조훈현이 어린 초등학생이었던 이창호를 제자로 받아들인 점도 이러한 서사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TV에서 보던 이창호는 늘 과묵하고 느릿한 말투를 가진 모습이었지만, 영화에서는 어린 시절 당차고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모습으로 그려졌습니다. 그는 자신만의 기풍을 찾아 돌부처라는 별명처럼 행동까지 차분해진 것으로 보입니다.
유아인을 제외하고는 영화가 진행되지 않는 상황에서 제작진의 고민이 컸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아마도 이창호 아역을 맡은 김강훈의 분량이 30분 정도로 늘어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결국 영화와 관련된 마케팅에서 유아인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졌고, 조훈현과 이창호의 대결을 다룬 영화에서 이창호 역할을 맡았던 유아인이 부재한 상황이 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자체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바둑을 전혀 모르는 관객이라도 이해하는 데 어려움 없이 즐길 수 있도록 잘 제작되었습니다. 제목인 <승부>처럼 사제지간이라는 관계를 넘어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대결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특히 스승인 조훈현이 공식적인 첫 대결에서 패배하며 무너지는 모습은 매우 현실적이고 강렬하게 그려졌습니다.
보통 배우 이병헌은 연기의 신이라는 표현을 듣는데, 이번 영화에서도 그의 연기는 흠잡을 데 없었습니다. 조훈현 역할을 맡은 그는 캐릭터를 완벽히 재현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습니다. 단순히 행동과 습관만 따라한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색깔로 캐릭터를 살려내며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조훈현의 라이벌로 등장하는 남기철은 실제로 서봉수 9단을 모델로 한 캐릭터로 보였습니다. 그는 특별출연임에도 불구하고 영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조훈현과 이창호의 바둑 대결뿐만 아니라 배우들 간의 연기 앙상블도 훌륭하게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스승으로서 자신을 뛰어넘는 제자를 바라보는 복잡한 감정선 역시 잘 드러났습니다.
스승을 존경하지만 배우려 하기보다 승리를 목표로 삼았던 제자가 결국 스승을 뛰어넘게 되는 과정은 영화 속에서 매우 설득력 있게 그려졌습니다. 조훈현과 이창호의 이야기가 이제서야 영화화된 것이 아쉬울 정도로 늦었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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