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수꾼 - 하퍼 리


<앵무새 죽이기>를 언제 읽었는지 기억도 안 난다. 20년도 넘었을 듯 하다. 워낙 예전에 읽었는데 그 이후로 꾸준히 스테디셀러로 남아 있는 걸 보면서 속으로 신기해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읽을 당시에 그다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기억은 없었는데 오래도록 사람들에게 계속 읽히는 책이 되었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이런 책들은 결국 고전으로 남게 된다. 시대정신을 관통하며 인류 보편 타당한 이야기가 소설에 녹아있을 때 책은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다.

완전히 잊고 있었는데 어느 날 저자인 '하퍼 리'가 검색이 되더니 대형서점에 도배된 것을 보게 되었다. 그동안 전혀 신작이 없던 하퍼 리가 이번에 새롭게 <파수꾼>을 출간했다. 워낙 오래도록 사람들에게 읽혔던 <앵무새 죽이기> 하퍼리가 신작이 없었으니 사람들은 궁금해 한다. 대부분 책을 한 권만 출판 하는 경우는 드물다. 더구나 이토록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가 된 작품은. 이러니 신작에 대한 기대감은 증폭될 수밖에.

확실하지 않지만 <파수꾼>은 기대만큼 사람들의 선택을 받지는 못한 듯 하다. 원래 <앵무새 죽이기>보다 <파수꾼>이 먼저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작품이라고 한다. 이런 설명을 하는 이유는 확실히 책의 템포나 내용 전개가 고전적이다. 이 책을 90세에 출판했다고 해도 자연스럽게 현재를 살아가고 있으니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책은 무척 고전적으로 내용이 전개된다. 아마도 최근 작가가 이 작품을 썼다면 3분의 1로 줄일 수 있을 정도다.

소설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중심 주제가 있다. <파수꾼>은 책 중반이 될 때까지 전혀 관련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아니, 짐작도 하기 힘들다. 성인이 되어 독립하여 뉴욕에 살던 진 루이즈는 2주일 정도 고향인 남부의 메이콤으로 돌아온다. 시대 배경은 1950년대다. (라고 썼지만 난 책을 읽으며 정확한 배경 년도를 몰랐다.) 활력이 넘치고 정신없던 뉴욕에 비해 메이콤은 전형적인 남부지역답게 느릿하고 동네에서 시시콜콜 비밀이 없을 정도로 모든 소문이 하루도 안 되어 퍼지는 곳이다.

아버지는 변호사로 오랫동안 메이콤에서 활동하셨고 오빠는 비극적인 사건으로 이제 없고 오빠친구였던 행크는 불후한 가정사를 극복하고 변호사가 되어 아버지와 함께 일하고 있다. 행크는 진 루이즈가 어릴때부터 도와주며 사랑이 싹 터 서로 메이콤에 올때만 만나는 사이지만 서로 결혼까지 생각하는 사이다. 늘 주체적인 삶을 살아온 진 루이즈는 메이콤의 삶과 생활은 답답하고 적응하기 힘들지만 행크와 만남과 결혼은 고민이다.
소설 내용은 이런 사실을 알려주는데 무려 반이상을 할애한다. 전형적인 예전 작품 스타일이다. 우리가 고전이라고 불리는 소설이 대부분 그렇다. 과거 사람들은 살아가는 삶의 시간과 흐름이 단순했고 느렸다. 자연스럽게 그에 맞는 글의 형식과 호흡을 갖고 있다. 부정하려 해도 모든 작가는 자신만의 호흡이 있다. 이 호흡은 작가 자신만의 성격과도 연관있고 삶의 패턴과도 연관되고 시대와도 밀접하다. 19세기 고전소설이 전부 그토록 현대인이 읽기 힘든 이유기도 하다.

이제 겨우 진 루이즈와 주변 상황을 모두 알게 된 이후에 동네 입장에서는 작지만 진 루이즈에게는 커다란 사건이 생긴다. 흑인 - 소설에는 니그로라고 표현한다. 당시 시대상을 정확하게 반영하려 용어를 변경하지 않은 것으로 추측된다 - 이 음주운전으로 사람을 친 사건이다. 오래도록 동네에서 어려운 일도 해결해주리라 믿었던 아버지가 사건을 맡을 것이라고 알았지만 그 본심이 달랐다. 단순히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당시에 흑인 인권과 해방, 투표권을 둘러싼 복잡한 속내가 있었다.

메이콤은 점차적으로 백인이 부족하고 흑인이 늘어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투표를 하게 되면 실질적으로 메이콤은 흑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아직까지 흑인은 지도자가 될 만한 사람이 없다. 제대로 메이콤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지 못하니 그때까지는 백인들이 권력을 가지면서 조금씩 변화를 줘야 한다는 것이 진 루이즈 아빠와 연인 행크의 생각이었다. 진 루이즈는 말도 안되는 이런 생각과 행동에 실망감을 느끼며 아버지와 행크에게 대들며 절교를 선언한다.

침착하게 아버지는 변호사답게 논리적으로 반박하고 진 루이즈는 성격과 혈기로 대든다. 신기하고 놀랍게도 아버지는 진 루이즈의 사고를 인정할 뿐마 아니라 자신의 반대편에서 활동하는 것마저 용납한다. 진 루이즈를 그렇게 키웠고 자신이 설계한 삶이 아닌 주체적으로 삶을 살아가길 원했다. 그것이 오히려 사랑이다. 책 내용은 당시 시대상과 흑인과 백인이 부대꼈던 내용을 이야기하려 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오히려 아버지와 딸의 이런 대화와 서로를 마지막에 인정(아버지는 원래 인정, 딸은 뒤늦게 깨닫고 인정)하는 모습이 더욱 인상적이었다.

자신의 자녀가 자기 뜻대로 되지 않거나 자신의 판단과 다른 결정을 내릴 때 화를 내는 것 자체가 생각하면 말도 안 된다. 나와는 다른 삶을 살아가는 주체이다. 자녀는 내가 될 수 없고 내 생각은 자녀와 다르다. 다를 수 있어도 식구라는 사실은 변함없고 서로 사랑하는 마음도 달라야 할 이유가 없다. 이런 개념이 너무 쿨하고 서양적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서양도 <파수꾼>에 나오는 부녀지간같은 관계는 거의 드물지 않을까한다. 내가 생각하는 인간관계는 이게 맞는 듯 하다.

나와 다르다고 상대방을 배척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 친하다고 내 생각과 같아야 할 이유가 없고 같은 것이 더 이상하다. 서로 비슷한 면도 다른 면도 있으니 서로 이야기가 되고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고 서로에게 성장시켜주는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닐까. 다름을 인정하는 것은 너무 어렵다. <파수꾼>에서 내가 읽은 내용은 그런 것이다. 살면서 이게 참 어렵고 힘들다는 것을 갈수록 느낀다. 남이 나에게 인정하는 것도 그렇지만 나도 남에게 나와 다름을 자꾸 인정못하는 걸 깨달으며 나이를 먹을수록 보수적으로 된다는 사실이 피부로 와 닿는다. 

어찌보면 정작 책에서 알려주려 하는 주제와는 다소 동 떨어진 이야기만 하게 되었다. 늘 말하지만 책이 저자 손에서 떠난 순간 그 책을 읽은 독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새롭게 탄생한다. 그러니 욕도 하고 칭친도 한다. 같은 책에 이런 반응이 나타난다. 이번 <파수꾼>에서 내가 느끼고 읽은 내용은 그렇다.

책 내용 중에 그냥 발췌한 대목 110페이지
"한 가지만은 결정을 내려야 해. 앞으로도 여기가 변하는 걸 보게 될 거야.
우리 생애에 메이콤이 완전히 변하는 걸 보게 되겠지. 그런데 너의 문제는 말이야.
먹은 과자가 손에 남아 있기를 바라는 것이지.
시간을 멈추고 싶지만 못 하는 거고.
조만간 메이콤인지 뉴욕인지 결정해야 할 거야"

까칠한 핑크팬더의 한 마디 : 조금 지루하긴 해
친절한 핑크팬더의 한 마디 : 이런 책을 읽으며 템포를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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