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015의 게시물 표시

만화 토지 1부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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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양반 계층은 존재했지만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 무엇보다 혼자 과부가 된 양반을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텐데 이제 밤에 몰래 찾아가서 겁탈을 하려 한다. 이런 소문이 돌고 이를 이겨내기위해 질병에 걸렸다는 소문을 낼 정도다. 그동안 양반은 양반이고 천민은 천민이라는 생각으로 체념해서 숙명으로 받아들였지만 겉으로는 따르는 모습을 보일지라도 그 밑에서는 균열이 생겼다.  뼈대있는 양반이나 올곧은 양반 정도를 따를 뿐 그 외에는 적대적으로 대할 정도다. 양반이라는 것때문에 참고 있을 뿐. 그렇게 시대는 흐르고 흘러간다. 살인죄를 저질른 남편빼문에 마을을 떠났던 칠성댁은 다시 마을로 돌아온다. 아이들을 데리고 타지에서 살아가는 것이 만만치 않았을 것이라는 예상도 되지만 그보다는, 타인에게  배타적인 이유로 보인다. 각자 살기 힘든 시절에 밥을 빼앗아 가는 사람으로 여겼을 것이다. 버텨내지 못하고 다시 마을로 왔지만 마을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지금도 여전히 이런 정서는 남아 있다. 내 편이 아니고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 않은 가족에게까지 연좌제로 벌을 준다. 나는 너와는 다른 사람이라고 우월적인 감정을 갖는다. 인구가 많아진 지금은 그나마 피할 구멍이라도 꽤 많았지만 작디 작은 마을에서는 아주 사소한 것들도 똘똥 뭉치는 경우가 아주 아주 많다. 갑자기 마을에 괴정(콜레라)가 돌면서 마을 사람들이 속수무책이 된다. 의원은 다른 곳으로 갔고 대처할 아무런 의료지식과 기술과 도구는 없다. 이런 상황에서 정말로 아무런 언질이나 대책도 없이 그동안 등장했던 많은 인물이 갑자기 죽는다. 읽다보면 답답한 장면이 참 많이 나온다. 현대를 사는 입장에서 이해가 안 되지만 당시를 살아가는 입장에서는 체념하고 산다. 다른 곳으로 가도 다를 것은 없다는 걸 알고 있기에. 이제 토지는 다음 세대로 넘어가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 질 듯 하다.

사회인대학교 낯가림학과 졸업하기 - 개그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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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힘든 직업중에 하나가 연예인이다. 대중 앞에 서서 오롯이 자신의 모든 것을 전부 공개해야 하는 직업이다. 정확하게 연예인이라는 직업은 없지만 대체적으로 TV에 나오는  사람중에 예능 영역에 속한 사람들이다. 배우, 가수 등등. 이들은 현대에 와 새롭게 해석된 직업인데 이들은 직업인으로 자신이 선택한 역할이 불특정 대중에게 노출되고 인기에 따라 부가 축적되다보니 대중의 잣대가 보다 엄격하다.  아무리 연기를 잘하고 가창력이 좋아도 대중에게 인기를 얻지 못하면 별 볼일 없다. 갈수록 사생활이 사라지는 세상에서 연예인들은 유독 두드러진다. 아주 조금 잘못해도 보다 엄격한 잣대로 대중이 꾸짖고 처벌하려 한다. 손가락질 하는 손중에 대다수가 자신에게 향한다는 사실은 게의치않는다. 심지어 더한 잘못을 한 정치인이나 여타 직종에 비해 더 물어뜯으며 즐긴다. 여하튼 잘못했다고 말한다. 자신들이 그 연예인이 돈을 버는 데 큰 도움을 줬다는 생각이 깃들어 간 것은 아닐까. 이중적인 태도도 보인다. 외국 연예인이 훨씬 더 나쁜 짓을 저질러도 노래를 잘 하거나 연기를 잘 한다면 별개의 것으로 구분한다. 반면 국내 연예인은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노출되면 특정 이미지를 덧입혀 부정적으로 묘사하기 일쑤다. 사회 구성원들이 갖고 있는 불만을 연예인들이 대신 받아주는 것이 아닐까하는 착각마저 든다. 이 중에서도 개그맨은 더한 잣대가 들어간다. 사람을 웃기는 직업을 갖고 있는 개그맨은 늘 웃어야 하고 어떤 일이 있어도 웃어야 한다. TV로만 보던 사람을 실제로 볼 때 각자 자신의 삶이 있는데도 구분하지 못하고 TV와 똑같을 것이라며 우습게 다가서기도 하고 말도 안 되는 요구도 한다. 자신에게 똑같이 누군가 한다면 기분나뻐할 것들도 꺼림김없이 강요한다. 개그맨들이 일상에서는 더 숙기가 없는 경우도 있으니 일반인들은 이런 인지부조화를 당혹해한다. 특히, TV에서 바보처럼 나오는 개그맨들을 볼 때 낮게 보기도 하지만 대부분 개그맨들은 참으로 똑똑하다. 똑똑하지 못하

스테이트 오브 더 유니언 -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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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국내에 출간된 더글라스 케네디의 모든 소설을 읽었다. 내가 좋아하는 이유는 지극히 통속적인 내용에 지적 허영마저 살짝 얹어 채워주기 때문이다. 단순히 내용뿐만 아니라 내용 안에 포함되는 각종 문화와 관련되어 있는 소재를 읽는 재미도 솔솔하다. 영화, 문학작품, 음악 등 작품 속 인물들이 다양한 문화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며 상대방을 예측하거나 자신을 알려주는 하나의 매개체로 활용하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그렇다고 모든 작품을 다 재미있게 읽은 것은 아니다.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작품도 있었다. 이번 <스테이트 오브 더 유니언>은 아쉽게도 재미가 살짝 떨어진다. 생각해보니 남자가 주인공인 작품에 비해 여자가 주인공인 작품이 재미가 덜했다. 지금까지 내가 읽은 소설은. 더글라스 케네디의 작품은 대중문화 영역에 있던 인물이 한참 잘 나갈 시점에 뒤통수를 맞고 추락한 후 다시 우연한 기회에 원래 자리로 돌아온다는 내용이다. 너무 통속적이지만 그 맛으로 봤다. 대중문화 속 인물들이 등장하여 소재를 선보이고 서로 이야기할 때 나도 그 작품을 읽어 봤다는 동질감과 나도 그 음악을 알고 작품 속에서 언급하는 다양한 문화이야기에 동참할 수 있다는 괜한 지적허영을 채우며 읽었다. 이런 통속적이며 지적 허영을 채워주는 작가는 기욤 뮈소도 있다. 기욤 뮈소는 최근에는 살짝 지겹다. 반복되는 내용에 너무 뻔한데 그나마 아직까지 더글라스 케네디는 여전히 내 허용을 채워준다. 이번에 읽은 <스테이트 오브 더 유니언>은 여자 주인공 입장에서 서술되었고 좀 답답한 면이 많았다. 비록 뜻하지 않게 나락으로 떨어졌어도 갖고 있던 재능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기회가 되었을 때 다시 올라설 수 있는 운을 거머지는 모습을 읽으며 쾌감을 느끼며 읽었는데 이번 책은 그런 면이 없었다. 물론 이번에도 나락으로 떨어졌다가 모든 것을 잃었지만 자신의 무죄가 전부 밝혀지며 갖게되지만 통속적인 쾌감은 아니다. 소설은 크게 두 파트로 나눠진다. 개방

이중톈의 이것이 바로 인문학이다 - 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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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중국, 일본에서 공자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그 중에서도 사실 유독 한국이 더욱 공자가 중요하다. 다양한 사상체계가 난립하고 유입되며 여러 사상이 혼재(??)되어 있는 중국과 일본에 비해서 한국은 공자의 가르침을 거의 중심사상으로 오랫동안 다양한 체계가 권장되었다. 오죽하면 종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유교라는 표현까지 쓸 정도다. 중국에서 뒤늦게 자신들보다 더 유교적 가치를 지키는 한국을 본받아야 한다는 소리도 있을 정도다. 중국 사람이니 중국인이 더욱 풍성한 이야기를 할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이중톈은 솔직히 처음 서점에서 그 이름을 접했을 때 우리나라 교수인줄 알았다. 중국인이라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되었고 상당히 많은 책마저 나온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중국인이 저술한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 편견이라고 하면 편견인데 책을 읽어보면 음모론을 이야기하건 중화사상에 빠져 있는 경우가 많다. 엄청난 문화와 역사를 갖고 있는 나라답지 않게 수준이 좀 떨어진다는 느낌이었다. 주변에 책을 좀 읽는다는 분들도 비슷한 의견이라 중국책을 선호하지 않는다. 이중텐같은 경우에 이번에 처음 접하는데 중국에서 갑부 47위에 위치한다고 하는데 기업인이 아닌 교수가 책을 출판하고 강연만으로 버는 금액이 상상초월이라 본다. 이중텐이 돈을 많이 번다는 것을 제외하면 책 내용은 딱히 더 대단할 것은 없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공자는 이미 수많은 책에서 다루고 언급되며 어느 정도 모르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 공자의 논어 등을 제대로 읽어 본 적은 없어도 다양한 책으로 공자의 사상을 접했고 공자일대기도 읽어 봤기에 새삼스럽지는 않은 인물이다. 공자는 굳이 이야기하자면 가진자를 위한 사상체계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는데 당시 시대상을 볼 때 지극히 자연스럽다. 계속 정치를 하려고 노력했지만 너무 이상적이라 당대에는 큰 환영을 받지 못했지만 덕분에 두고 두고 사상이 후대에까지 남아 있을 수 있었다. 제자들의 역할이 가장 컸다고 본다. 대부분 종교위

만화 토지 1부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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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인가 좀 지지부진하다고 느꼈던 토지가 4편에 가서 갑자기 급하게 돌아간다. 3편까지 욕망이 표출되지 않고 조금씩 모락모락 나오던 인물들 중에 더이상 숨기지 않고 이성을 뛰어넘기 시작했다. 토지에 나오는 대부분 인물들에게는 욕망이 있다. 토지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인물들은 욕망을 갖고 있다. 욕망을 내 놓고 이야기하는가, 혼자 삭이면서 지내는가, 그저 욕망일뿐, 이라면 사는 가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먹고 살기도 힘든 시절을 살던 사람에게 욕망이 없었을리 없다. 신분 계급에 대한 아무런 의심이나 발전 가능성 자체를 생각지도 못한 시대가 아니라 어느 정도는 그럴 수 있다는 씨앗이 마음 속에 다 심어져 있던 시대였다. 이 중 욕망을 갖고 실행하고자 했던 귀녀, 김평산, 김이평은 서로 공모를 하고 자신들의 현재 처지를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를 결행한다. 이들에게 손가락질을 할 수도 있고 측은하게 바라 볼 수 도 있다. 그들의 욕망은 나쁜 것이 아니었지만 방법이 잘 못되었을 뿐이다. 상당히 영악하게 실행했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진정한 악인이라면 좀 더 치밀하고 오랜 시간을 뜸들여 했을텐데 이들은 다소 순박(??)하다면 순박했다. 그렇다 하여도 최치수가 다소 쉽게 퇴장한 것이 뜻밖이었다. 무엇인가 비밀을 간직하고 터질 듯한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었기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 여겼지만 그저 분위기만 깔아줬다. 워낙 긴 책에서 이런 씨앗을 퍼뜨려야만 나중에 큰 꽃을 필 것이라 예상되지만. 과거가 지금보다 정이 넘치는 시대라고 하지만 다른 곳으로 갈 곳이 없던 처지에 서로 의지할 수 밖에 없던 점도 있다. 매일같이 서로 숨길 것 없이 모든 것이 낱낱히 밝혀지는 동네에서 지지고 볶고 하며 살아간다. 나 자신의 개인 사생활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힘든 시절이다. 내 속마음마저도 조심하지 않으면 밝혀질 정도이니 서로가 서로를 적당한 선에서 살아간다. 그런 면이 읽으면서 답답하다. 인간이 배워도 현실이 비루하면 어쩔 도리가 없다. 내

폴트라인 - 대출이 주는 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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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이유로 최근에 읽는 책이 나도 모르게 지난 금융위기에 대한 분석하고 알려주는 책인지 모르겠다. 나도 모르는 촉이 나를 그쪽 방향으로 이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개뿔!! 그럴리가. 그저, 나도 모르게 그런 책을 읽고 있다. 그저 아쉬운 것은 미국에서 이야기하는 미국에 대한 분석이라 아쉽다. 하지만, 대단한 것이 이게 단순히 미국만의 사건이고 금융위기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미국에서 먼저 터진 금융위기였지만 읽다보면 다 연결되어있고 엮여있다. 미국이 그렇게 소비를 하게 된 것이나 전 세계적으로 수출하는 국가등이 어떻게 달러를 서로 주고 받으며 리시크를 헷지했다고 생각하며 과감히 파티를 벌였는지 알게 된다. 단순히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 주택때문에 발생한 사건으로 보지만 좀 더 사고를 확장하고 시야를 전 지구적으로 넓히면 - 그렇다고 오지까지 확장하지는 말자 - 이 모든 것이 동시대적으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전지구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이걸 알아야 하는 이유는 아무리 우리가 탄탄하거나 힘들더라도 생각지도 못한 놈이 찾아올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폴트라인>은 통합된 경제와 세계에서 추구하는 최상의 이익과  특정 개인이나 기관이 추구하는 이익이 늘 부합되지 않기에 일어나는 불일치다. 개별 이익이 단순히 볼 때는 총합의 이익에 부합하는 듯 보이지만 각자 추구하는  이익이 다르다보니 균열이 생겨 서로간 잘못된 지점에서 어긋난 것을 폴트라인이라 할 수 있다. 정치경제라 불러야 한다. 경제는 정치와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정치인들이 경제를 주무를 수 있다. 선한의도이든 악한의도이든. 그렇게 폴트라인은 다양한 면에서 발생한다. 미국의 격화되는 소득 불평등 원인은 교육 불평등에 있다. 소득 불평등으로 인해 유권자의 불만이 커지자 정치권이 선택한 방법은 주택 금융확대였다. 이러한 정치적 압력은 금융 산업의 대출 분야가 크게 왜곡되는 현상을 가져왔고, (중략) 가계 대출 확대를 통한 주택 보유율 증대는 소득 불평등 문제가

가족이라는 병 - 가깝고도 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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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힘들고 어렵지만 언제나 막(?) 대할 수 있는 존재가 가족이다. 가족을 구분하자만 나를 기준으로 위로 부모님이 있고 아래로는 자녀들이 있고 옆으로는 배우자가 있다. 자녀들은 내가 아닌데도 나로 착각하는 존재다. 나도 모르게 감정이입을 너무 깊게 해서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며 화를 내고 윽박지르기도 한다. 정작 나 자신도 못하는 걸 자녀들에게 강요하며 내 마음같지않게 행동한다며 혼내기도 한다. 분명히 내가 아닌데도 나도 모르고 자아일체가 되어 자녀와 나를 일체화시킨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를 과거만큼 많이 갖지 않으면서 이런 현상은 더욱 심해졌다. 나는 내 삶이 있고 자녀는 자녀의 삶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각자 자신의 삶에 집중하는 것이 맞지만 일정 기간동안은 자녀에게 올바른 길을 인도해줘야 한다는 점 때문에 과도하게 참견한다. 마음에 들지 않는 점때문에 나도 모르게 꿈틀거리지만 내가 그 나이 때 나도 그랬다는 점을 자각한다면 한 발 물러서서 기다려줄 수도 있어야한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이 다 잘 자라 지금 다시 또 부모가 되었다.  옆으로 배우자는 <가족이라는 병>에서는 반려라고 표현한다. 책 저자는 자녀가 없는 관계뢰 자녀에 대한 부분보다는 배우자와 부모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배우자는 어디까지나 함께 하는 파트너일 뿐이다. 서로 상대방을 참견하고 관여하지 않고 각자 자신의 길을 가는데 있어 응원해주고 격려하며 함께 걸어가는 존재다. 심지어 특정 파티에 갈 때 꼭 배우자와 갈 필요없이 파티 성격에 맞는 다른 이성과 함께 동참해도 상관없다. 부모님 경우에는 나를 낳아주셨지만 시간이 지나면 독릭하고 각자 삶을 살아간다. 안부나 전하고 내가 살아가며 만난 사람들중에 더욱 친근하고 동질성을 느끼는 사람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정을 나눈다. 부모님이라고 자녀를 강압하고 자신의 품 안에서 품으려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독립한 자녀는 어서 독립시켜 자신의 삶을 살아가도록 만들어야지 집에서 빈둥 놀게 하며 자기 앞가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