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 헤르만 헤세


소설과 관련되어 고전이라 불리는 작품을 잘 따져보면 그리 오래되진 않았다. 어딘지 고전이라하면 최소 몇 백년은 되어야 할 듯한데 그렇지 않다. 미술이든 음악이든 문학이든 대부분 기껏해야 100~200년이 고작이다. 특히나 최근 100년 안팎이 제일 많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들에게 작품이라고 추앙받는 것은 작품이 세상에 나오고 얼마되지 않아 결정되는 것이 아닐까도 한다. 아무리 우리가 무엇이라고 떠들어도 결국에는 당대 사람들이 선택해야 한다.

가끔 시간이 지난 후 재발견으로 좋은 작품이 알려지는 경우도 있다. 이런 극히 드문 경우를 제외하면 당대 사람들에게 보편타당한 정서와 공감을 불러일으켜 인정 받은 작품이라야 한다. 시대가 지나며 뉘앙스는 달라질 수 있어도 인류보편 타당한 정서 등이 시간이 지나도 사람들이 인정한다. 시간이 꽤 지나도 인간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는 뜻도 된다.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살아가는 모습과 생활이 달라졌을 지라도 인간이라는 본성은 동일하다.

지금까지 여전히 사람들에게  살아남아 선택받는 작품은 그런 힘을 갖고 있다는 뜻으로 읽힌다. 지금도 고전이라 불리는 작품을 사람들이 읽는 것은 그런 이유가 아닐까. 한편으로는 지적 허영도 어느 정도 있다고 본다. 굳이 꼭 고전을 통해서만 그 정서와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보면 안정빵이다. 대부분 사람들이 읽고 좋았다고 칭찬하니 선택한다. 최근 작품은 아직 검증되지 않았으니 무엇인가 모험을 시도하는 것은 다소 꺼름칙하다.

반면에 이러다보니 작품을 접한 후 별로인데도 차마 이야기를 못할 수도 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검증된 작품을 잘 알지도 못하는 내가 별로라는 판단을 내리는 것은 엄청난 모험이다. 유명한 작품은 유명하기 때문에 훌륭할 때가 많다. <데미안>이 그렇다는 의미는 아니다. 늘 고전을 읽어야겠다는 부채감을 갖고 있다. 고정관념이란 쉽게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책을 좀 읽는다고 하는데 고전을 읽지 않았으면 수준이 떨어지는 느낌이 있다. 그도 아니면 고전을 그래도 읽어야 한다는 책 좀 읽었다는 소리를 듣는다.

언제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중고등학교 때 <데미안>을 읽은 듯하다. 늘 그렇듯이 읽었다는 기억만 있다. 딱히 어떤 내용인지는 가물가물하다. 워낙 유명한 문구가 이 책에는 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시스."
청소년의 성장기에 대한 책은 이유여하와 시대를 막론하고 솔직히 어떤 이야기를 할지는 비슷하다. 사춘기를 거치며 자아가 형성된다. 그 전까지 수동적인 삶을 살아간다면 사춘기부터 나라는 사람이 누군인가를 자각하고 사회 구성원과의 만남도 달라진다. 이전과 달리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스스로 무엇이라 하기 형언하기 힘든 마음 상태가 된다. 내적 요인과 외적 요인이 갈등하며 폭발하는 순간도 온다. 흔히 말하는 중2병이 대표적이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 컨트롤하기 힘들다. 자신도 모르게 행동이 나오게 된다. '오이디프스 콤플렉스'도 따지고보면 부모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되려는 시도인데 그것자체가 사춘기를 거치며 자아가 형성되며 생성되는 질문에서 출발한 것이 아닐까. 이전까지와 달리 세상을 달리 보게 된다. 사회의 부조리도 보이고 선과 악이라는 것이 보다 선명하게 느껴진다. 불의를 참게 된다.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는 누군가를 참기도 한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 한꺼번에 몰아치는 시기가 사춘기다.

책 첫 에피소드 제목이 두 세계라는 것은 그런 차원에서 이 책의 핵심이다. 우리는 늘 두가지 세계에서 고민한다. 선명하게 선과 악으로 구분할 수도 있다. 무엇이 선인지 악인지에 대해서 고민이 된다. 선이라 생각했던 것이 그렇지 않다. 악이라 증오했던 것을 내가 하고 있는 걸 발견하기도 한다. 성장한다는 것은 변질인지도 모른다. 사람이 어떻게 변할 것인가라고 물어본다면 사람은 변한다. 나쁜 일을 해도 대체로 그런대로 잘 살아간다. 좋은 일을 했는데도 못 사는 경우도 참 많다.

세상에 오롯이 나라는 사람 자체로 이제 홀로서야 한다. 부모의 햇빛이든 그늘에서 벗어나야 한다.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부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성인이 너무 많다. 그들은 결국 이 책 주인공인 싱클레어처럼 데미안을 만나지 못한 이유일까. 싱클레어는 과연 데미안을 만났기에 자아를 형성하고 세상에 알을 깨고 나오게 된 것일까. 데미안이 아니었어도 알을 깨고 나왔을까. 어느 누가 옆에서 독려하고 촉매제 역할을 해도 그 알을 깨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누구도 그건 대신할 수 없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예전보다 정신연령은 늦어지고 있다. 신체나이가 늘어난만큼 함께 더뎌진 것이 아닌가도 한다. 여전히 사춘기를 벗어나지 못하거나 오지 못한 사람도 있다. 이걸 좋아할 필요는 없다. 세상을 자신만의 시선으로 바라볼 여건이 안 되었거나 억지로 잊고 살아가는 걸 의미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작품 속 세계와 다르다. 작품은 기승전결이 있어 주인공이 무엇인가 깨닫고 끝날 수 있다. 이제부터 아마도 잘 살아가겠지. 

우리는 그렇지 않다. 무엇인가 깨닫고 어제와 다른 오늘을 살아간다고 해도 또 다시 반복이다. 여전히 미묘하게 깨달은 것과 다른 세상이다. 내 의지대로 꼭 되는 것도 아니다. 다른 모습을 하고 늘 나에게 문제는 던져지고 상황은 다가온다. 그때마다 늘 고민하고 번민하며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기로에 선다. 지속적으로 선택이 교차되며 성장한다. 나만 성장하는 것이 아닌 세상도 함께 발전하며 쫓아가게 된다. 그 와 중에 여전히 힘들다. 데미안같은 존재는 어차피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책은 늘 나에게 데미안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렇기에 이런 책을 읽어가며 난 오늘도 성장한다.

까칠한 핑크팬더의 한 마디 : 역시나 고전은 잘 안 읽혀.
친절한 핑크팬더의 한 마디 : 고전은 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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