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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평범한 미래는 어떤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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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편 소설 묶음인 책 제목이 <이토록 평범한 미래>다. 여러 편의 단편 중에 첫번째로 수록된 글의 제목이기도 하다. 분명히 소설이라는 걸 알면서 읽는데도 불구하고 자꾸 나도 모르게 혼동스러웠다. 가장 큰 이유는 내용 전개가 제 3자 화법이 아닌 나라서였다. 더구나 뭔가 착각하게 나라는 사람이 어딘지 작가의 배경과 비슷하다는 착각을 했다. 처음에 읽으면서 소설이라는 점을 까먹고 읽었다. 일다보니 내가 읽고 있는 책이 에세이라고 착각하고 읽었다. 그러다 에세이가 아닌 소설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달라질 것은 없다. 작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나는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러니 그가 어떤 말을 하든 나는 진실을 알 수 없다. 에세이로 자신의 진짜 이야기를 하든, 소설로 창작된 내용을 말하든 무슨 차이가 있었을까. 무엇보다 소설가라는 직업은 이야기꾼이다. 그가 하는 말이 진짜 사실인지 여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가 쓴 글을 읽고 재미있고 색다르다면 그것만으로도 성공이 아닐까. 첫번째 에피소드는 뭔가 신비하면서도 허무하다. 나이 들어서는 몰라도 젊을 때는 괜히 염색적이고 신비로운 것에 관심이 간다. 젊음은 마음 것 발산할 수 있지만 거꾸로 볼 때 반대에게 강렬히 끌리는지도 모르겠다. 소설 속 주인공은 여자 친구랑 삼촌을 만난다. 둘은 사귀는 건 아니고 썸을 타고 있던 것이 아닐까한다. 어른이 볼 때 어떤 관계인지 한 눈에 알아봤는지 삼촌은 둘이 사귄다고 생각한다. 둘은 여러 이야기를 많이 나눈 듯한데 엄청난 말을 한다. 여자 친구가 자살을 계획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말에 주인공은 얼핏 생각을 했을 뿐 직접적으로 함께 할 생각이 있던 건 아닌 듯하다. 그 친구는 엄마가 소설가였다. 유신 시절에 소설을 썼는데 판매금지당한다. 책이 나오자마자 판매금지를 당해서 전부 수거되었다. 그러니 책을 구할 수 없었다. 엄마도 책을 갖고 있지 못하니 읽고 싶어도 읽을 방법이 없었다. 삼촌이 출판사 관련된 일을 해서 혹시나 알까하고 찾아왔던 것이었는데

독서의 기록으로 성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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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서로 새롭게 인생을 시작했다는 분이 많다. 독서는 누군가를 그렇게 변화시키고 성장하게 만들어준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고백을 하고 책까지 펴 낸다. 독서를 시작하는 사람은 많지만 꾸준히 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적다. 또는 꾸준히 하지만 속도가 너무 더뎌서 생각보다 변화가 늦을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독서의 기록> 작가는 대단하다. 대략 3년이 안 되는 기간동안 무려 800권이 넘는 책을 읽고 리뷰를 올렸다고 한다. 거의 인간의 경지가 아닌 듯하다. 책을 읽어보니 일주일에 5권 정도를 읽고 리뷰 쓰는 걸 목표로 삼았다고 한다. 평일 기준으로 하면 매일같이 올렸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책 리뷰를 올렸으니 너무 자연스럽게 네이버에서 독서 분야 인플루언서까지 되었다고 한다. 하루 일 방문자도 2000 명도는 못해되 되는 듯하다. 거기에 도서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자신이 직접 수익화를 다양하게 만들었다. 도서 관련되어 에드포스트도 있지만 원고 등도 받아 매월까지는 정확히 모르겠는데 300만 원도 한 달이 있나보다. 그렇게 볼 때는 나보다 나은 듯하다. 나도 나름 블로그로 수익을 내고 있긴 하지만 지금까지 300만 원을 낸 적은 없다. 대신에 나는에드포스트 이외에 다른 건 한 적이 전혀 없다. 책을 받아도 아작까지 원고료를 받고 리뷰를 쓴 적이 없다. 그 외에도 돈을 받고 원고를 써서 블로그에 글을 올린 적이 없다. 상당히 짧은 시간에 이렇게 수익화까지 해 냈으니 대단하다. 그런 과정을 책에 자세히 소개한 듯했다. 자신이 어떻게 독서를 하게 되었고 체계적으로 수익화까지 했는지 말이다. 더구나 작가는 내가 운영한 52주 독서에도 참가했다고 알려왔다. 내 책을 읽고 책으로 인생이 변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고 한다. 메일을 보내줘서 나름 뿌듯했다. 정작 책에는 내 책이 전혀 소개되지 않아 살짝 의기소침해지긴 했어도. 대기업 사원으로 열심히 일을 했는데 풀리는 것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나름 열심히해서 잘 나갔지만 아이가 나온 후에도 출장을 갔다고 한다.

빌러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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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러비드>는 1800년대 후반에 미국을 살아가는 흑인에 대한 이야기다. 작가 토니 모리슨이 쓴 소설이다. 흑인이라는 정체성과 미국에서 벌어지는 흑백 갈등에 대해 한국에 살고 있는 나는 크게 와닿지 않을 때가 있다. 미국을 가 본적도 없기 때문에 미묘한 차이를 알기는 더욱 힘들다. 과거에 흑인은 노예였다. 하나의 상품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점은 꼭 흑인이 아니라도 한국에서도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한국은 명확한 구분이 쉽지 않았다는 점이다. 시간이 지나 누가 노예였는지 여부를 파악하기 힘들다. 다 비슷하게 생겼으니 알 길이 없다. 심지어 양반 가문이라고 해도 이걸 확인하기도 쉽지 않다. 반면에 흑인은 너무 명확하다. 과거에 흑인은 무조건 노예였다. 노예가 아닌 흑인은 있을 수 없었다. 좋은 주인을 만나 노예지만 인간적으로 대할 수는 있을지언정. 흑인을 미국에 데리고 온 목적 자체가 노동을 시키기 위해서다. 백인이 하기 싫은 일을 하는 건 분명히 아니다. 좀 더 생산성을 올리기 위해서라고 할까. 흑인이라는 점은 피할 수 없는 증명이 된다. 미국에서 살고 있는 모든 흑인은 무조건 노예다. 노예는 사람이지만 사람으로 취급받지 않는다. 하나의 물건이다. 언제든지 필요에 의해 사고 팔 수 있다. 더구나 가격이 그렇게 높다고 할 수도 없다. 인간은 죽어서 쓸모가 하나도 없다. 돼니나 소는 죽은 후에 쓸모가 아주 많다. 그러니 흑인은 살아있을 때 가치는 인정받지만 죽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한마디로 젊을수록 쓸모가 있고, 나이를 먹을수록 필요가 없어진다. 젊은 흑인 남자는 그런 면에서 쓸모가 아주 많다. 백인은 흑인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짐승으로 봤다. 분명히 자신들과 이야기도 할 수 있는 존재인데도 인간으로 보질 않았다. 철저하게 쓸모에 따라 이용했을뿐이다. 심지어 흑인 여성은 아이의 젖을 주는 역할로 기능을 했다. 자신의 아이에게만 주는 것이 아니었다. 일을 해야 했기에 다른 아이에게도 젖을 먹어야했다. 추가로 단순한 모성이 아닌 잉태의 기능이 중요

아스퍼거 남편과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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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제목이 <아스퍼거 남편과 살고 있습니다>라서 어떤 이야기를 할 지 한 눈에 들어왔어요. 아스퍼거는 얼마전 크게 화제가 되었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로 인해 많이 알려졌죠. 그전까지 아스퍼거 증후군을 갖고 있는 사람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었습니다. 일상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죠. 드라마라를 봐도 다소 어눌하거나 생활이 일반인에 비해 살짝 다르긴 해도 별 무리없이 함께 살아가는 걸 알 수 있죠. 이 책을 보면 더욱 알 수 있어요. 아스퍼거 증후군은 자폐증이라는 표현때문에 더욱 그렇기도 하죠. 뭐든지 다소 극단적인 게 기억에 남잖아요. 보통 전철에서 시종일관 중얼거리면서 왔다갔다 하는 사람이 있어요. 딱 봐도 가까이가면 안 되겠다는 느낌을 갖게 되죠.그러다보니 아스퍼거남편과 함께 살아간다는 점이 더욱 신기하게 느껴졌죠. 더욱 놀라운 것은 아스퍼거 남편이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입니다. 어떻게 보면 쉽게 선택할 수 없는 여러 조건을 두루두루 갖췄다고 할 수 있는거죠. 작가가 호주에 유학을 갔다 만났다고 하네요. 생활력이 강하고 추진력이 대단하다는 느낌을 갖게 되더라고요. 호주에 유학을 갔지만 여유가 있는 건 아니라 알바를 해야 했어요. 대단하게도 전단지를 만들어 호주에 있는 상가를 돌아다니며 뿌렸다고 합니다.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영어도 제대로 못하는데 말이죠. 먹고 살아야 하니 연락이 온 곳에 가서 돈 안 받아도 되니 일주일하겠다고 했다네요. 다행히도 커피 등의 주문하는 영어가 반복이고 제한적이라 적응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어느 남자가 매일같이 와서 같은 주문을 했다고 하네요. 에프터 비슷한 걸 했는데 무시했다고 합니다. 매장 주인도 잘 했다고 하고요. 배달하던 사람인데 그 이후 일체 연락이 없었습니다. 작가가 오히려 2달 정도 후에 물어봤다고 하네요. 그렇게 둘은 사귀게 되었다고 합니다. 전혀 몰랐는데 알고보니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고 있던거죠. 어쩌면 한국어가 아닌 영어라 그럴 수도 있지 않았을까라는 

세상의 마지막 기차역에서 아쉬움을 달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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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와 헤어지는 건 대체로 힘든 일이다. 그것도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다면 더욱 그렇다. 어느 정도 준비된 헤어짐은 그나마 괜찮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갑작스럽게 헤어진다면 어떨까. 사고가 생겨 사랑하는 사람을 어느날 갑자기 만나지 못하게 된다. 엄청난 후회와 아쉬움과 전하지 못할 말들이 가슴에 쌓여 응어리가 되지 않을까. 내가 아무리 말하고 싶어도 전달할 대상자가 없다. 어떤 말을 해도 들어줄 사람이 없다. 자기 고백이나 마찬가지 상황이 되어 버린다. 다시 기회를 준다면 못다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간절하게 바라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서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 못한 말은 평생 응어리 진채로 가슴에 남아 맴돌게 된다. 그나마 이를 해결하는 방법 중에 글로 쓰는 것도 있다. 비록 내 마음을 전달하지 못하고 알지도 못하겠지만 나라도 뱉어내면서 응어리가 조금은 풀리지 않을까한다. 직접 만나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못하겠지만 내가 생각할 때 가장 최고의 방법이 아닐까라고 본다. 대부분 사람에게는 그런 일이 잘 벌어지지는 않는다. 보통 만나 이야기하고 서로가 헤어질 것에 대해 알고 있는 상태에서 결정한다. 질병에 걸려도 어느 정도는 서로가 마음의 준비를 한 후에 헤어진다. 거의 유일하게 사고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헤어지게 된다. 그런 상황이 오면 어느 누구도 평정을 유지하지 못한다. 그 사고를 알게 되는 즉시 할 말을 잃고 앞이 깜깜해진다. 평소에 알고 지내는 사람에게 사고가 나도 그럴진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어떨까. 어쩌면 평생 다시는 누군가를 사랑하지 못할 수도 있다. 가슴 한 가운데 또아리를 틀고 나를 안 놔줄지도 모른다. 나를 안 놔주는 건 바로 나라고 해야겠지만. 바로 그렇게 가슴에 누군가를 묻고 살아가게 된 사람의 이야기가 <세상의 마지막 기차역>이다. 어떤 사고가 났을 때 우리는 단순히 뉴스로 보지만 각자 삶이 분명히 있다. 당사자와 관련된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사연이 있다. 사소한 것은 절대로 없다. 전부 엄청난 사연과 

딱 1인분만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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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으면서 계속 착각했다. 책 제목이 <딱 1인분만 할게요>의 저자가 책 날개에 보면 공무원이라고 써 있다. 작가 직업이 9급 공무원이라고 써 있는데 책 내용도 공무원 이야기다. 이러다보니 해당 내용이 본인의 실화인지 아닌지 여부가 무척이나 궁금했다. 더구나 작가 이름이 이서기인데 책에서 나오는 주인공 이름도 이서기다. 이서기인데 노운구청에서 근무하고 있다. 이 정도면 거의 본인의 모든 걸 전부 다 공개한 게 아닐까 했다. 분명히 소설이니 전부 진짜는 아닐 듯했지만. 그럼에도 나도 모르게 읽으면서 계속해서 어디까지 본인의 이야기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MZ세대라는 표현이 들어갔는데 진짜 MZ세대는 자신이 왜 MZ세대라고 불리는 지 모른다고 한다. 관심도 없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진짜 MZ세대는 20대를 말한다. 그 중에서도 20대 중반 이하를 말하는 게 아닐까한다. 책을 읽기 전에는 주인공이 20대라고 생각했다. 막상 읽어보니 주인공은 30대 중반이었다. 여기에 결혼을 한 상태지만 중요한 건 부속품으로 살아간다는 뜻 아닐까했다. 책에서 나오는 내용은 공무원이 배경이지만 일반 회사로 해도 차이는 없을 듯하다.  정시 출근과 정시 퇴근에 대해서는 무조건 찬성한다. 분명히 정해져 있는 시간인데도 그걸 지키지 않는 곳이 회사뿐만은 아닌 듯했다. 공무원도 그랬나 보다. 나도 회사를 다닐 때에는 과감히 그랬다. 초반부터 그렇게 행동했더니 나중에 뭐라 하긴 했지만. 책 목차 중 첫번째가 조직 부적응자인데 생각해보면 나도 그랬던 듯하다. 늘 정시 퇴근을 하니 부장이 불렀던 걸 보면 말이다. 자신의 일을 똑부러지게 하진 못한다. 여기에 스스로도 부족한 점을 하려고 하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분명히 노력을 하긴 하지만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아마도 그렇기에 조직 부적응자라고 표현한 듯하다. 사회라는 곳은 냉정하다면 냉정한 곳이다. 무엇인가를 가르칠 때가 있다. 신입일 때는 그렇지만 그 이후는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는 본인이 하지

파리는 날마다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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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는 날마다 축제>는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쓴 책이다. 헤밍웨이는 널리 알려진 책을 많이 쓴 작가다.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는가> <노인과 바다>등은 많은 사람들이 읽지 않아도 제목을 알 정도다. 누구에게나 처음이 있고, 무명일 때가 있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헤밍웨이가 아직까지 소설가로 명성을 얻기 전 이야기다. 헤밍웨이 자신이 직접 쓴 에세이다. 파리에서 머물며 집필하던 때에 벌어진 다양한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아직까지 이렇다 할 작품을 선 보이지 못할 때라 경제적으로도 다소 궁핍했다. 다양한 곳에 기고를 해서 받은 원고료로 먹고 살 때다. 신문사 특파원으로 있었기에 거기서 나오는 돈으로 먹고 살았다. 아직까지 장편을 써 본 적이 없어 주로 단편 위주로 집필하던 때라는 걸 읽으면 알 수 있게 해준다. 파리는 어딘지 낭만적인 느낌이 물씬 풍긴다. 기본적으로 프랑스어가 갖는 나근나근함이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갖게 된 것은 아닐까한다. 정작 프랑스어는 많이 쓰지 않는데 말이다. 파리는 워낙 문화와 관련된 것들도 많다. 중요한 건 그런 것들을 내가 이용하고 활용해서 감상하는 등의 행동을 해야만 의미가 있다. 헤밍웨이도 분명히 그런 문화활동을 한 것 같은데 그런 부분은 별로 나오지 않는다. 그보다는 헤밍웨이 주변 인물과 자신의 집필 활동에 대해 꽤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알려준다. 그 중에서도 역시나 가장 인상적인 건 스콧 피츠제럴드와 함께 한 에피소드다. 책에서 둘이 함께 한 경험이 분량상 꽤 많이 차지할 정도인데 이미 스콧은 유명한 때였다. 아직까지 헤밍웨이는 본인이 쓴 작품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실력은 주변에서 인정한 듯하다. 스콧은 이미 쓴 소설인 <위대한 게츠비>가 유명해져서 경제적으로도 그다지 어렵지 않은 때였다. 아마도 그런 점 때문에 어느 정도는 헤밍웨이가 자격지심이 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여기서 나오는 스콧은 그다지 정상적으로 보이지 안고 다소 이상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