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 - 자유


무척 궁금했다. 왜들 이렇게 조르바를 좋아할까.나에게 <그리스인 조르바> 작가인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을 쓴 작가로 기억한다. 솔직히 그 소설을 읽었다는 기억만 남아있을 정도로 대략 30년 전에 읽지 않았나 싶다. 이러다보니 늘 조르바 이야기를 들을때마다 그 작가라고 꼭 확인하는 버릇까지 생겼다. 조르바를 좋아하는 사람을 보면 - 지극히 편견을 갖고 - 결혼한 남자와 미혼 여성이었다.

솔직히 확실히 그 이유를 파악하긴 힘들다. 내가 어떻게 그들이 좋아하는지 알 수 있겠는가. 조르바를 알지 못하는데 말이다. 이제 읽었으니 그 이유를 어렴풋이 느낀다고 할까. 고전 소설은 이유를 모르겠지만 어딘지 모르게 천천히 여유를 갖고 느릿하게 읽어야 그 참 맛을 느낄 것 같은 기분이 있다. 하다보니 최근에 바뻐 이 책을 무려(?) 일주일도 넘게 읽었다. 계속 돌아다니고 읽을 시간이 적다보니 오래도록 읽게 되었다. 솔직히 천천히 느릿하게 읽는 이유는 사실 쉽게 안 읽혀서다.

쉽게 읽힌다면 아무리 책이 두꺼워도 금방 읽을 수 있다. 고전이라 불리는 소설이 안 읽히는 이유는 지금 살고 있는 삶의 템포와 다르기 때문이다. 소설을 창작한 작가의 삶의 태도와 템포와 의도적인 문체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모든 소설은 작가가 가공한 세계다. 아무리 가공한 세계라해도 작가가 살고 있는 세계에 영향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소설이 창작된 시대를 알아야 도움이 된다. 현대소설은 굳이 몰라도 템포 자체가 지금과 별 차이가 없다.

현대 작가가 최대한 느린 템포로 써도 고전 소설보다 빠른 호흡이다. 이러니 자연스럽게 고전소설은 읽는 것은 쉽지 않다. 작품 세계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시대상황을 알아야만 더 잘 이해되고 재미가 배가 된다. 지금 우리 사회에 벌어지는 현상과 상황을 우리는 알고 있어 현대소설을 읽자마자 의미를 알아채지만 100년 후에 읽으면 어떤 의미인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이치다. 이 책에도 결국에는 그리스인 조르바가 살아가던 시대의 상황을 알아야만 정확한 이해와 재미가 증가하리라 본다.

그렇다고 내가 굳이 작품 속 배경을 찾아보진 않았다. 읽다보면 첫번째로 드는 의문은 이거였다. 과부. 작품 속에서 여자라는 명칭보다는 과부가 나온다. 무엇보다 작품 속에 나오는 과부는 현대인의 관점에서 볼 때 이해가 되지 않는다. 현대인의 관점은 너무 시건방진 시점이고 내 관점에서. 무엇보다 작품 속에서 정확한 명칭하면 조르바에게 다들 흠뻑 빠진다. 조르바는 희대의 바람둥이라고 해도 된다. 만나는 여자에게 최선을 다해 사랑한다. 단 한 여자에게 머물진 않는 것 같고.

과부들도 너무 쉽게 자신의 감정을 준다. 작가가 남자고 당시를 생각하면 지금보다 더한 남성 중심 사회니 그런가하는 생각을 했다. 사랑에 굶주려있다고 할 정도로 금방 사랑에 빠진다. 주인공인 두 남자라 그럴 수 있다는 생각도 했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다소 의아했다. 워낙 바람둥이가 인기 좋은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당연하지만 - 남성에게는 공공의 적이지만 - 설정이라고 하기에는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뒤에 가서 모든 의문이 풀렸다. 당시 시대 상황이 어떤지 정확히 모르지만 <그리스인 조르바> 속 세상은 과부는 가장 천한 신분이었다. 다시는 사랑을 할 수 없는 존재였다. 남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존재였고. 어떤 인격적인 존중도 없이 언제든지 가차없이 생명을 어떤 재판은 커녕 의견도 필요없이 제거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 장면을 읽고나서 생각해보니 작품 내내 여자라는 존재가 아닌 과부라는 정체성을 가진 존재인 여성이 등장했다.
작품 속 과부들에게 조르바는 자신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유일한 남성이었다. 존재가 아닌 남성이었다. 남성으로 그들을 여성으로 바라보고 사랑하는 사람이자 남성이었다. 조르바는 거기에 늘 자유롭다. 어디에 얽매이려 하지 않는다. 하는 일도 자유롭게 마음 내키는대로 하진 않는다. 자신이 맡은 일에는 최선을 다한다. 그 외 삶의 태도는 자유 그 자체고 대체적으로 무대포라 느낄 정도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과연 조르바 같은 인물이 내 주변에 있다면 나는 그를 자유로운 영혼이라며 좋아하고 만나고 함께 일을 할까. 그렇지 않다.

내 주변 사람이 조르바처럼 행동하고 생각하고 말 한다면 오히려 껄끄럽고 부담스럽다. 그만큼 내 자신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의미도 되지만 사람은 자신이 생각한대로 행동하고 말을 내 뱉지 않는다. 반대급부로 조르바를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소설이나 영화나 드라마를 좋아하는 이유는 대리만족이다. 내가 하지 못하는 걸 나 대신 해 준다는 만족. 조르바는 영혼 자체가 자유롭다. 그 이유는 역시나 작품 후반부에 나온다.

작품 속 조르바는 이미 노인이 나이다. 그 전에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사실 궁금했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 왔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자유로운 영혼은 나와 상관이 없을 때 멋져보이지 내 주변에 있으면 골치아프다. 60세가 넘도록 그렇게 살아 왔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역시나 작품인가 라는 생각도 했다. 좀 더 읽어보니 조르바는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삶을 살고 태도를 보이고 생각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여러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이 대목이 가장 내가 생각하는 지점과 일치했다.

"그리스인이든, 불가리아인이든, 터키인이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좋은 사람이냐, 나쁜 놈이냐? 요새 내게 문제가 되는 건 이것뿐입니다. 나이를 더 먹으면(마지막으로 입에 들어갈 빵 덩어리에다 놓고 맹세합니다만) 이것도 상관하지 않을 겁니다. 좋은 사람이든 나쁜 놈이든 나는 그것들이 불쌍해요. 태연해야지 하고 생각해도 사람만 보면 가슴이 뭉클해요. 오, 여기 또 하나 불쌍한 것이 있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자 역시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두려워한다. 이자 속에도 하느님과 악마가 있고, 때가 되면 뻗어 땅 밑에 널빤지처럼 꼿꼿하게 눕고, 구더기 밥이 된다. 불쌍한 것! 우리는 모두 한 형제지간이지. 모두가 구더기 밥이니까."

나는 이데올로기가 제일 싫다. 종교이데올로기, 국가이데올로기, 민족이데올로기. 기타등등. 대부분 인간이 가장 끔찍하고도 단 하나의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고 저지를 때 바로 이데올로기가 접목된다. 물론, 내 국가를 지키기 위해서와 같은 고상한 이념이다. 상황에 따라 달리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인류역사에서 벌어진 모든 처참한 기록은 전부 이데올로기다. 보다 정확한 표현을 하자면 이데올로기를 빙자한 이익 추구였다. 여기에 하나 더 덧붙이지만 편 가르기!

조르바가 지금처럼 자유로운 영혼이 된 것은 이데올로기 피해를 직접 받았고 그 페혜와 해악을 몸소 체험했던 것이다. 이데올로기가 특정 집단의 이익과 결부될 때 내 편과 네 편이 나눠지고 내 편이 아니면 적이고 죽여도 된다. 내 편마저도 이해를 못 시키면 죽이는 게 가능하다. 문제는 이럴 때 순수한 이데올로기가 아닌 특정 집단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데올로기를 이용해서 상대방을 조종한다. 지금도 여전히 변함없이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다. 

아주 큰 국가 단위부터 여러 이익 단체는 물론이고 기가 차지도 않고 몇몇 사람이 모여있는 카페까지도 말이다. 몇 천명에서 몇 만명을 보유한 카페라면 작다고 할 수는 없을지라도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그저 안타깝다. 덧없음을 느낀다. 살아가기에 내 편과 아닌 편으로 구분하면 살아가긴 보다 쉬울지 모른다. 평생 잘못된 것을 깨닫지 못하고 살 수도 있다. 비록, 나 자신이 규범적이고 규칙적인 생활패턴과 삶을 살지라도 난 자유로운 영혼이다. 

<그리스인 조르바>와 같은 고전 소설을 읽게 되면 재미없을 때도 있고 지루하기도 하다. 재미있고 흥미진지할 때도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인류 보편적인 타당성을 근거로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작품들이라 그런지 몰라도 무엇인가 쓸꺼리가 많아진다. 조르바를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이여, 얽매이지 말고 자유롭게 세상을 보고 생각을 유연하게 하면 되지 않을까. 지금 세상은 조르바가 살던 시대보다 더 자유롭지 못하다. 과거보다 더 평균이라는 잣대가 활발하다. 특히나 한국처럼 내편, 네편을 편가르며 나와 다르면 이해하려 하지 않고 배척하는 사회에서 더욱 조르바같은 인물은 나오기 힘들다.

고전 소설답게 읽는 것도 - 의도하지 않게 일이 바빠 그랬지만 - 꽤 오래도록 읽었고 이 리뷰도 어느 덧 2시간은 넘게 쓰고 있다. 이 마저도 자꾸 TV보느라 집중을 하지 못해 그런 것도 있지만. 이렇게 고전은 재미있든 없든, 유익하든 아니든 무엇인가 생각할거리를 던져주는 맛이 있다. 그렇게 <그리스인 조르바>는 영혼이 자유로운 나에게 찾아왔다. 자유롭게 얽매이지말고 보내자. 바바이.

까칠한 핑크팬더의 한 마디 : 난 소설 뒤에 평론 실린 걸 싫어한다.
친절한 핑크팬더의 한 마디 : 자유, 여자는 남성의 로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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